Edge of Seventeen

<쫑아는 사춘기>,  still on the <Edge of Seventeen>

 

 

승진자 교육에서 40분 정도 개별 진단 후, 나만을 위한 '마음 보고서'와 추천 시를 선물 받았다.
물론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 성격, 성향 등을 분석한 보고서도 좋았지만, 추천 시와 추천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교육 과정 중, 추천 시의 문구와 앞으로의 다짐을 함께 작성하여 포토월에 붙이는 과제가 있었다.
다음 차수에 승진 교육을 받던 동기가 우연히 찾았다며 사진을 보내주었다. 

FullSizeRender.jpg

 

똑같은 하루, 24시간이지만 물리적인 거리에서 생기는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하루 아침에 바뀐 환경, 전혀 모르는 언어, 그리고 그 속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일상.

마음만큼은 이 모든걸 받아들일 수 있는데, 몸은 아직 시간이 필요한가보다.
내게 시차 적응 같은 건 없다고 자만하던 찰나,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습관처럼 핸드폰을 확인하고 다른 시간에 살고 있는 사람을 떠올리며 괜히 시간을 한 번 더 보는 것, 이 것만큼은 낯설지가 않다. 
나는 누군가의 새벽에 따뜻한 달이 될 수 있을까? 추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덴마크가 생각보다 따뜻하다.

 

(디리링) "8층입니다." 백화점에 예쁜 언니가 엘레베이터 층수를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철커덩) "거스름돈 400원 여기!" 아파트 상가 슈퍼에서 아주머니가 거스름돈을 주셨다.
4,5살 어린 나이에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에 엘레베이터 언니, 그리고 슈퍼 아주머니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여자아이들의 꿈인 피아니스트, 발레리나를 거쳐
초등학교 졸업 전에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저는 한국을 알리고 싶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어릴 때부터 지겹게 들어온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에 이젠 대답 조차 할 수 없었다.
분명 크긴 컸는데, 뭐가 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어릴 적 추상적이고 모호한 형태의 꿈 조차 사라지고, 오히려 어른에겐 꿈을 꾸는 것이 사치가 되어버렸다.
 

"꿈꾸는 직장인". 회사를 다니면서도 항상 잃고 싶지 않았던 게 있었다.
그냥 살아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삶. 내 마음이 움직이는 곳으로 나아가고 도전하는 자세.
끊임 없이 자극 받고 성장하려는 태도. 긍정적인 생각. 주관적 행복. 그리고 정말 소중한 것들을 지키는 마음. 

덴마크에서 누구보다도 순수하게, 열정적으로 꿈꾸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꿈을 꾸는 것은 사치가 아니었다는 것에 확신을 갖게 된다.
한국에서는 휘게를 외치며 덴마크 라이프스타일을 표방하는 가운데, 덴마크에 한국의 맛과 멋을 알리려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꿈과 포부를 듣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초등학교 때 말했던 내 추상적인 꿈이 다시 생각이 났다. 


아, 꿈이란 건 꼭 혼자 꾸고 이루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그리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계속 꿈 꿀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무엇보다도 덴마크 2일차의 나는, 지금 그 어느때보다 의미있고 재미있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종화. 중성적인 이름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친구들은 쫑, 쫑아 등 조금은 부드러운 형태로 바꿔 부르곤 했다.
이런 별명으로 뜻하지 않게 만화 주인공이 되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쫑아는 사춘기> 덕을 참 많이 봤다.
만화 속 양갈래 머리의 쫑아가 귀여웠고, 당시에 꽤나 인기가 많았기에 싫을 이유가 없었다. 


덴마크로 오는 비행기 안, 추천 받은 영화 <Edge of Seventeen>을 봤다. 
평범한 10대 소녀의 사춘기, 그리고 그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수많은 감정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서 보다보니, 영화가 끝나버렸다. 
(그 중에서도 연애에 관한 장면과 감정들이 설레면서 풋풋했고, 또 섬세하면서도 다듬어지지 않아 좋았다.)
미운 7살처럼 미운 17살이 존재하는 걸까? 


27살의 나, 아직도 쫑아라고 불리는 나는, still on the edge of seventeen이다.

 

Day 2 in Denmark.